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특집기획, 대한민국의 역사 100년된 교회를 찾아서 3회] 119년을 맞은 순교와 순국의 정신이 깃든 제암리 교회, 희생과 각성의 성지로 남다

제암리 학살 100년, 희생의 자취와 신앙의 정신을 되새기다
스코필드 선교사의 기록, 세계에 알린 제암리의 비극
119주년 된 제암리 교회, 순교와 애국의 정신을 다시 새기다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류승우 기자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일제의 잔혹한 학살로 23명이 순국했다. 신앙과 조국에 대한 충정을 바탕으로 끝까지 맞섰던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국민에게 깊은 울림과 각성을 전하고 있다.

 

제암리 교회, 조국과 신앙을 위한 순교의 장
1905년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 세워진 제암리 교회는 초기부터 기독교 복음 전파와 지역 사회 계몽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설립자 안종후는 지역 주민들에게 신앙과 애국 의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3·1운동 당시 주민들과 함께 일제의 억압에 맞서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힘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일제의 잔혹한 보복을 피하지 않았다.

 

 

일제의 보복, 제암리 교회에서 벌어진 참극
3·1운동의 여파로 일제는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폭압적 조치를 강화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의 교회와 민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교회에 집결시킨 후 총격과 방화를 가하는 학살을 자행했다. 현장에 모인 주민들 중 탈출을 시도한 이들은 교회 밖에서도 사살되었으며, 총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신앙과 조국을 지키려 했던 순교자들로 남아, 지금도 제암리 교회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스코필드 선교사, 제암리의 비극을 세계에 알리다
제암리 사건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한국명을 ‘석호필(石虎弼)’로 사용한 그는 삼일운동 당시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 카메라로 촬영하며 참상을 세상에 폭로했다. 또한, 일제의 잔혹함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국제 언론에 기고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그의 헌신은 그가 해방 이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교육자로서 남은 삶을 헌신하게 할 만큼 깊고 강렬했다. 현재 제암리에는 그의 동상과 비문이 자리해 그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순교와 순국, 다르지 않은 이름으로 새겨지다
제암리 학살 사건 이후에도 교회는 재건되어 신앙과 애국 정신을 이어갔다. 일본의 속죄 위원회는 1968년 교회를 새롭게 재건하며 속죄의 뜻을 표했으며, 1982년에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합동묘지가 조성되었다. 2001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사건 당시의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이 전시되어 순국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러한 기념사업은 제암리 교회가 단순한 사건지를 넘어 신앙과 애국 정신의 성지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한국 교회에 던지는 물음, ‘진정한 순교란 무엇인가?’
한국 교회는 과거의 순교자들이 가졌던 신앙과 희생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교회는 사회적 책임과 신앙적 헌신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그 정신이 한국 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만큼 순교의 의미가 잊혀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과거 순국 선열들의 정신을 되찾아 애국과 희생의 본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각성의 과제를 안고 있다.

 

 

신앙과 애국의 성지로 남은 제암리 교회
오늘날 제암리 교회는 매년 많은 이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다.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은 희생자들의 묘역을 참배하며 신앙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의 발자취를 기리고, 그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제암리 교회의 역사는 한국 교회와 국민에게 신앙적 각성과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하는 성지로서, 신념과 애국 정신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