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종합편성tv신문 김효미 기자 |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됐지만, 그 중심은 곧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동했다. 조재천 전주대 교수는 예루살렘이 교회의 탄생지이자 상징적 중요성을 가졌지만, 항구적인 교회의 터전은 될 수 없었던 신학적 이유를 분석했다.
항구적 교회의 터전이 아닌 상징적 출발지_예루살렘 교회의 탄생과 확장
조재천 교수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존하고 있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예수의 마지막 행적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제2성전기 유대교 신앙의 상징적 장소였으며, 초기 기독교 역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성령 강림 후 3천 명이 회심하는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의 교회의 중심 이동
조 교수는 예루살렘이 영구적인 교회의 터전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제시했다. 사도행전 내러티브에서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확장된다. 특히, A.D. 70년 성전 파괴는 예루살렘이 더 이상 교회의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메시아를 살해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갈등
예루살렘은 옛 언약을 상징하는 장소로, 새 언약을 담기엔 부적합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난 강력한 반-성전적 주제는, 가시적 성전이 아닌 영적·천상적 성전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사건으로 시작됐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대적인 박해로 인해 교인들은 흩어졌으며, 이로 인해 교회의 중심도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됐다.
예루살렘 교회의 소멸과 그 영향력
예루살렘 교회는 A.D. 43/44년경 또 한 번의 박해를 겪었고, 이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언급을 줄여간다. 몇몇 교부들의 저술에 따르면, 1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데카폴리스로 피신했으며, 2차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에 유대인 출입이 금지되면서 교회도 소멸돼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지역 교회들에 신학적·목회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조 교수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신학적 전환을 재조명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상징적 의미와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